"나는 이토가 한일 두 나라의 친선을 저해하고 동양의 평화를 어지럽힌 장본인이기 때문에 한국의 의병 중장 자격으로 죄인을 처단한 것이지, 결코 자객으로서 그를 살해한 것이 아니다."
1910년 2월 12일, 여순(旅順)지방법원에서 개정한 결심공판에서 안중근은 자신의 거사가 동양평화를 위한 것이었다고 진술한다. 또 항소를 포기하고 옥중에서 '동양평화론'을 집필한다.
안중근의 사상형성에는 아버지 안태훈의 영향이 컸다. 그는 장남 중근의 생활에 간섭하지 않고 재량권을 주어 대범하게 키웠다. 그 결과 안중근은 친구와 의(義)를 맺고, 음주가무를 즐기며, 날랜 말을 타고, 사냥하는 것을 '4락(樂)'으로 여길 만큼 호방한 성격을 지녔다. 또 '모든 인간은 존엄하다'는 천주교의 교리를 통해, 안중근은 "일본인도 마음만 바로 먹으면 나라를 망하게 하지 않을 것"(관동도독부 특별면담기록 '청취서')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독서의 영향도 컸다. 안중근은 '조선역사' '만국역사' 등을 탐독했을 뿐 아니라 '대한매일신보' '황성신문', 미국의 '공립신보' 등을 열독하여 국내외 정세를 보는 안목을 길렀다.
공판정의 안 의사. 왼손 약지의 단지 흔적이 선명하다.
러일전쟁(1904~1905) 때까지 안중근은 '일본맹주론'을 편다. 경시청 신문에서 그는 "동(東)으로 뻗는 서방세력의 침략에 대응해 동양은 일본을 맹주(盟主)로 하고 조선, 청국과 정립(鼎立)하여 평화를 유지하지 않는다면 백년대계를 그르칠 것"이라고 답변한다.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이기자 "황인종이 백인종에게 승리했다"며 기뻐했다. '동양평화론'은 당대 지식인들 사이에 폭넓게 퍼져있는 사상이었다. 일본도 대륙침략을 미화하는 데 이를 이용했다.
그러나 일본의 '동양평화론'이 침략을 위장하는 거짓 평화론이었다면, 안중근의 그것은 한중일의 독립과 공동번영을 추구하는 진정한 평화론이었다. 러일전쟁 후 일본의 한국지배와 대륙침략이 노골화되자, 안중근은 일본의 배신행위와 한국의 독립의지를 세계에 알리는 '최후의 방법'으로 이토 사살을 선택한다. 사형의 조기집행으로 완성되지 못한 그의 동양평화에 대한 '큰 그림'은 옥중에서 고등법원장에게 밝힌 5개조에 담겨 있다.
"첫째, 여순을 삼국이 공동으로 관리하는 군항으로 만들고, 삼국이 이곳에서 동양평화회의를 조직한다. 둘째, 삼국 공동의 은행을 설립하고 공용 화폐를 발행한다. 셋째, 삼국 공동의 군대를 편성하고 타국의 언어를 가르친다. 넷째, 한국과 청국은 일본의 지도 아래 상공업의 발전을 도모한다. 다섯째, 한·청·일 3국의 황제가 로마 교황을 방문해 협력을 맹세하고 왕관을 받아 세계인의 신용을 얻는다."('청취서')
안중근의 동양평화론은 당시로선 실현 가능성이 없었다. 그러나 이태진 서울대 명예교수는 "유럽공동체보다 70년이나 앞선 획기적인 평화공동체 구상"이라고 평가했다. 최근 전개되는 '한중일 FTA(자유무역협정)' 논의가 100년 전 안중근이 꿈꾸었던 '동양평화'의 모습과 닮았다는 데 또 한번 놀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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